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522

[스크랩] 땅 이름의 뿌리와 지명유래

[세교동(細橋洞)과 잔다리]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 이 마을 앞 냇가에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세교리 細橋里]라 했고, 우리말로 [잔다리]로 부르고 있다고 전해 내려오나, 땅이름에서 [잔]은 [작은, 좁은, 가는 細]등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좁은 들]이라는 뜻의 [잔들]이 그렇고, [가는(細)골]이란 뜻의[ 잔골]이 그렇다 이 [잔]은 뒤에 [ㄱ]의 음이 따라오는 경우는[ 장]으로 발음되어 [잔개울]이 [장개울]로 [잔가리]가 [장가리]로 옮겨 가기도 했다. 들이 좁으면 [잔들]이 되는데, 이 [잔들]이란 이름보다는 [잔다리] [잔다래] [잔다이] 등의 이름이 많다. 경북 경산군 용성면 장재리의 남쪽 / 청송군 현서면 도리의 웃마을 앞 / 경남 울산 두서면 차리의 찻골 서쪽에 있는[잔들..

논란의 광개토왕비 해석, 실마리 찾나

최연식 동국대 교수 ‘신묘년조’에 도전적 해석. 왜·백제·신라 전란 지목한 32자 글자 부분 사라진 글자 부분 고대 소국 ‘반파’로 해석. 왜가 신묘년 반파로 건너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해석 1884년 사코 중위가 일본에 가져간 광개토왕비의 탁본. 학계에서 ‘쌍구가목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흐릿한 원래 탁본의 글자윤곽을 좀더 잘보이도록 자의적으로 덧칠했다. 주황색 선 안의 구절이 논란이 된 ‘신묘년조’의 일부다. 압록강 너머 중국 지안 옛 국내성터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비가 올해로 1606년째 서 있다. 아들 장수왕이 414년 세운 고구려 문화유산의 대명사다. 높이 6m를 넘는 판석에 1775자의 예서체 한자들로 왕의 치적을 새긴 이 거대 비석은 한민족 역..

조금 다른 인류사

주간조선연재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태곳적부터 잘 살던 나라2607호 | 2020.05.11 태곳적부터 잘 살던 나라 태곳적부터 그랬다. 우리나라는 잘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 만한 땅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한... weekly.chosun.com 고대 천문지도에 한반도 역사가 새겨져 있다2608호 | 2020.05.18 고대 천문지도에 한반도 역사가 새겨져 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세월과 사실 왜곡을 뚫고, 진정한 역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엔 기록이 남지 않아 알 수 없었던 과거의 모습... weekly.chosun.com 고구려인은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의 강을 지배했을까2609호 | 2020.05.25 고구려인은 어떻게..

선사시대 매장 무덤 발굴 / 세계사연표(年表)에서의 위치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서 선사시대 매장 무덤 110기 발굴 [출처: 이집트 관광유물부 제공 / 연합뉴스 2021.04.28. ] 1 이집트 왕조이전인 선왕조 시대(BC 6000∼BC 31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계란형 무덤 68기. 2 이집트동기(銅器) 시대인 나카다 3기(BC 3200∼ BC 3000년)의 다른 계란형무덤 5기. 3 이민족인 힉소스가 통치했던 제2중간기(BC 1782∼BC 1570년)에 속하는 직사각형 형태의 무덤 37기. 이집트에서 발굴된 매장 무덤 유물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연대가 서로 다른 100기 이상의 선사시대 매장 무덤들이 발굴됐다. 이집트 관광유물부는 27일(현지시간) 자국 고고학자들이 북부 다칼리아주의 쿰 알-칼레얀 유적지에서 매장 무덤 110기를 발굴했다고 밝혔..

“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명작의 비밀㉕] 2021.04.10. 신동아 표정과 몸짓으로 만들어낸 ‘소리 없는 아우성’ ● 당대 신라인 모습 꾸밈없이 담아낸 토우 ● 죽은 사람과 함께하는 부장품으로 주로 쓰여 ● 토우로 소박하게 신라인 생활상 담아내 ● 단순한 형태로 삶과 욕망 내밀히 표현 1926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신라시대 토기와 토우가 대거 발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土偶裝飾長徑壺)는 모두 2점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경북 경주시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신라 토기다. 높이 34cm. 항아리의 목 부분엔 5cm 내외의 각종 토우가 붙어 있다. 가야금을 타고 있는 배부른 임신부,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 개구..

명당과 알봉. 돌알(核石)과 알돌과 알작지.

앞산(동쪽)인 수덕산 서쪽기슭, 정상에서 양쪽으로 뻗어 내린 좌청룡 우백호가 커다란 알 하나를 품고 있는 형상이 또렷하다. ▼요즘“알봉(내가 붙인 이름이다)”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고자 접근을 시도를 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길을 개척하지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으며 며칠째 이쪽저쪽으로 헤매고 있는 중이다. 불원간 뜻은 이루어지리라. 나는 저 모습을 보면서 명당에 자리한 고대왕릉을 떠올렸고 알과 관련된 여러 말들을 연상하곤한다. 부동산투기행위 "알박기" 모양이 알처럼 둥근 "돌알(핵석, 核石)" 몽돌이 깔린 "제주도의 알작지해변" 보석처럼 빛나던 "호주 할렛 코브 해변(Hallett Cove Beach) 몽돌" 등 말이다. ▼우리 마을(덕산면 광천리)을 돌아다니다보면 많은 ‘돌알’을 보게 된다. 돌알은 ..

[조용헌의 영지 순례]절 더부살이 산신각, 왜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있을까

▲ 강원도 영월과 경북 영주 사이에 있는 고치령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산령각. 고고학은 땅속에서 유물을 발굴한다. 땅속의 유물을 통해서 고대인의 생활양식을 발견해 내고 추론해 낸다. 고고학 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한다. 구석기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로병사는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1만년 전에도 늙고 병들어 죽고 억울하게도 죽고 생존의 압박에 쪼들려 살았다. 그때라고 편하게 산 것이 아니다. 이 압박과 고통은 지금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변한 것이라고는 포장지와 디자인뿐이다. 수천 년 전 조상들의 삶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확인하는 순간 거기에서 어떤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그 어떤 항심(恒心)이 발생한다. 현세의 고통을 초월적인 입장에..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산 아래 구릉 사이에 자리하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미륵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에 창건 기록이 전한다. 미륵사지석탑미륵사지 석탑은 사역의 서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석탑의 시원(始源)이다. 미륵사지와 석탑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師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던 중 용화산 밑 연못가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해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회랑을 각각 3개소씩 만들었다. 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도솔천에서 내..

익산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이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金堂)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전통사회에서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근본을 상징했으며,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단 주위에는 유(壝)라는 낮은 담을 두르고, 다시 사방에 4개의 신문(神門)을 설치한 담을 둘러 이중으로 담을 설치하였고, 그 외부에 제사준비를 위한 부속시설을 두었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 祈雨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社稷署)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하지만 1910년..